• [정재홍의 시선] 일본의 미국 베팅과 한국의 고민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지난주 미·일 정상회담과 미·일·필리핀 정상회의에서 미국은 일본을 ‘국제질서 수호의 공동 책임자’로 선언하며, 중국 견제의 핵심 역할을 맡겼다. 일본은 미국의 글로벌 파트너 입지를 확보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10일 정상회담 후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미·일 글로벌 파트너십의 핵심은 상호협력 및 안보조약에 따른 양국 간 국방 및 안보 협력”이라며 “미·일 동맹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보, 번영의 초석임을 확인한다”고 밝혔다. 미·일 동맹은 그동안 미국이 일본을 방어하는 일방적 관계였으나, 앞으로는 양국이 공동으로 일본·동아시아, 인도·태평양의 평화·안보에 관여하는 상호적 관계로 발전하게 됐다.     ■  「 미국의 글로벌 파트너가 된 일본 위상 높아지고 경제 실속도 챙겨 미·중 사이 한국의 입지 고민 커져 」    양국의 군사동맹은 다자 협의체로도 확대된다. 성명에 따르면 미·일·호주 3국 공동의 미사일 방어 네트워크 협력이 추진되고, 내년부터 미·일·영 3국의 정례 군사훈련을 시작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영·호주 안보협의체인 오커스(AUKUS) ‘필러 2’에 일본의 참여를 공식화했다. 필러 2 참여국은 인공지능·양자컴퓨팅·사이버 안보·해저기술·극초음속 미사일 등 8개 분야 첨단 군사 역량을 공동 개발한다. 미 국가안보회의(NSC) 관계자는 일본 외에 한국·캐나다·뉴질랜드를 추가 파트너로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은 미국 주도의 새로운 글로벌 안보 시스템에서 ‘소 다자(mini-lateral) 협력체’를 통한 ‘격자형 구조’의 핵심 국가로 위상이 높아지게 됐다. 그동안 동아시아가 한·미, 미·일, 미·필리핀 등 양자 동맹을 맺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수레바퀴형 구조였다면, 이제는 미·일을 중심으로 여러 소다자 동맹 구조를 확대하는 격자형 구조의 그물로 중국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전환한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11일 미국 연방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일본은 미국의 ‘지역 파트너’에서 이제 ‘글로벌 파트너’가 됐다”면서 “미국은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함께한다”고 약속했다. ‘지구촌 경찰’ 역할에 피로감을 느끼는 미국인들의 짐을 덜어주겠다는 기시다 총리의 말에 미국 의원들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10~11일 워싱턴 체류 중 과거사 반성과 관련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이든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는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상처를 치유하고 우정의 새 장을 시작하기 위한 가장 대담한 조치를 취했다”며 기시다 총리를 치하했다.   일본의 글로벌 위상 강화는 미·일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데 따른 것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 실패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국력 소모가 커지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국들에 더 많은 역할과 비용을 부담시키는 전략을 펴왔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전환’(Pivot to Asia) 정책, 지난해 8월 한·미·일 정상의 캠프 데이비드 선언, 지난주 미·일 ‘글로벌 파트너’ 선언은 모두 중국 견제 전략의 일환이다.   일본은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경쟁국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미국과 이해가 일치한다. 일본이 중국을 홀로 상대하기는 어려운 만큼 미국과 연대해 견제에 나선 것이다. 미국의 대 중국 포위망의 근간인 인도·태평양전략은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제안을 미국이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은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고, 미국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면서 국제무대 위상을 높이고 경제적 실속을 챙기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다. 미국 정·관계엔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에 걸맞게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문이 많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거세진 상황에서 미국의 확장억제(핵우산)와 주한미군은 한국 안보의 핵심이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처럼 발 벗고 미국과 연대해 중국 견제에 나서는 데 한계가 있다. 경제 등에서 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그러나 미·중 사이 어정쩡한 외교는 한·미 동맹을 미·일 동맹의 하위 동맹으로 고착시키면서 중국과의 갈등만 키울 수 있다.   세계정세의 큰 흐름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 미·일 동맹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중국 견제 전략을 무시하거나 이탈하는 건 치명적 실수가 될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생존을 담보하는 한·미 동맹을 중심에 두고 외교 전략을 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일 관계가 중요하다. 미국에 있어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중요한 국가다. 문재인 정부 시절 일본과의 관계가 나빠지자 미국과의 관계도 악화됐다. 원칙과 현실에 맞게 미국의 전략에 동참하면서 한·미·일 협력과 함께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도 관리하는 종합적 외교 전략이 중요하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4.04.17 00:26

  • [정재홍의 시선] 폐지할 건 여성가족부 아닌 여성 불평등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윤석열 대통령이 여성가족부 폐지에 나서고 있다. 여가부는 지난달 김현숙 전 장관이 물러난 뒤 후임을 공석으로 둔 채 차관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여가부 실·국장급에는 다른 부처 출신 공무원들을 임명할 계획이다. 윤 정부는 4·10 총선에서 승리하면 정부조직법을 개정해 여가부를 폐지하겠다는 방침이다.   일부에선 여가부가 시대적 소임을 다 했기에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가부가 남성에 대한 역차별 논란을 불러오며, 사회적 갈등을 깊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가부가 사회 갈등을 조장하는 듯한 행보를 보인 건 사실이다. 여가부는 2011년 청소년의 심야 시간대 게임 이용을 제한하는 ‘셧다운제’를 도입해 청소년들의 반발을 샀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등에서는 여가부가 젠더 갈등을 오히려 악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  「 남녀 소득 격차 세계 꼴찌 수준 노동시장 차별에 최악의 저출생 여성 평등 위해 여가부 할 일 많아 」    윤 정부는 여가부가 없어지면 여가부 담당 업무들을 다른 부처에 배당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여성 일자리 문제는 고용노동부, 청소년과 여학생 문제는 교육부와 지자체, 여성 보건과 아동 양육 문제는 보건복지부, 성범죄 문제는 경찰·검찰 등에서 담당하게 한다는 것이다.   여가부는 정말 시대적 소임을 다해 없어져도 될 조직이 됐는가. 한국의 직장과 사회에서 성별 격차가 사라지고, 출산과 보육에서 남녀가 공평하게 책임지고 있는가. 현실은 정반대다.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6일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The glass-ceiling index)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29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여성의 노동참여율, 남녀 고등교육·소득 격차, 고위직 여성 비율, 육아 비용, 남녀 육아 휴직 현황 등의 지표를 반영해 29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지수를 산정한다. 2013년 지수를 처음 발표한 이후 한국은 12년 연속 꼴찌다.   한국의 남녀 소득 격차는 31.1%로, 지난해에 이어 29위였다. 여성의 노동참여율은 남성보다 17.2%포인트 낮아 27위를 기록했다. 관리직 여성 비율(16.3%), 기업 내 여성 이사 비율(12.8%) 모두 꼴찌에서 둘째였다. 이는 한국 여성이 다른 선진국 여성보다 심각한 소득 불평등을 겪고 있고, 노동시장에서 소외당하고 있으며, 사회적 권한 역시 작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지수에서 아이슬란드·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이 1~4위를 차지했다.   노동시장의 성차별적 구조는 세계 최악의 저출생율(지난해 4분기 기준 0.65)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국회입법조사처는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고용 불안정, 저임금, 성차별적 채용 등 복합적인 차별 구조에 놓여있어 이를 해소하는 것이 실질적인 저출생 대책이라고 진단했다. 실제 남녀 고용률 격차는 20대에 2~3%포인트에 불과하지만, 출산·육아를 경험하는 30대에 들어서면 30%포인트 수준으로 벌어진다. 지난해 기준 30대 남성 고용률은 90%에 육박하지만, 30대 여성 고용률은 54.6~64.4%에 그쳤다. 30대에 들어서면서 남성은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에 들어가는 반면 여성은 25~29세 사이에 고용률이 가장 높았다가 30대에 하락하고, 40대 이후에 다시 상승하는 패턴을 보였다.   남녀의 비정규직 규모 차이도 높다. 지난해 전체 임금근로자에서 남자 정규직은 70.2%, 비정규직은 29.8%이다. 반면 여자 정규직은 54.5%, 비정규직 45.5%로 나타났다. 또 여성 노동자의 비정규직 비중은 30대 초반부터 지속해서 증가하지만, 남성의 비정규직 비중은 50대에 들어선 뒤에야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노동시장에서 성차별적 인식·문화 등이 제대로 개선되지 않은 점이 저출생이라는 사회문제로 표출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여성의 낮은 경제활동 참가율, 임금·성별 격차 등은 정부가 노력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 만큼 여가부를 중심으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다.   저출생에 따른 인구 감소 시대에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 증가는 국가경쟁력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상대적으로 소외된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고 합당한 대우를 받게 하는 건 여성뿐 아니라 국가 전체의 발전 차원에서도 바람직하다. 예전에 비하면 여성 인권이 개선됐다지만 한국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선진국과 엄청난 격차가 있는 여성 평등을 증진하려면 이를 전담하는 정부 부처인 여가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여가부를 폐지하는 건 현실을 무시하고, 세상 절반의 인권을 무시하는 일이다. 폐지해야 할 건 여가부가 아니라 여성 불평등이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4.03.13 00:25

  • [정재홍의 시선]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유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오는 11월 5일 미국 대선을 앞두고 조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이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최근 미국 유권자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1%가 바이든이 ‘재선 자격이 없다’고 답변했다. 바이든이 ‘다시 뽑힐 만하다’는 응답은 38%에 불과했다.   CNN과 여론조사기관 SSRS의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바이든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금 맞붙을 경우 트럼프가 49%를 얻어 바이든(45%)을 4%포인트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의 우세는 미 대선 결과를 좌우하는 경합주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블룸버그통신·모닝컨설트가 최근 애리조나·조지아·미시간 등 7개 주요 경합주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트럼프는 48%의 지지율로 바이든(42%)을 6%포인트 앞섰다.     ■  「 트럼프 인기는 성과 있었기 때문 반이민·경제·대외정책 호응 높아 트럼프 진영 접촉해 이해 높여야 」    미 대선이 아직 9개월 남아 그사이 지지율은 요동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바이든과의 양자 대결에서 꾸준히 앞서고 있고 트럼프 지지자들의 열광적 지지가 뒷받침되고 있어 각종 사법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그의 당선 확률은 어느 때보다 높다. 한국 등 자유주의 국가들은 트럼프의 당선을 우려한다.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동맹을 경시하고, 관세 인상 등 보호무역 정책으로 국제 무역을 움츠러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미국인들의 트럼프 지지를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각종 성 추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노골적 무시, 자기 과시 등으로 인해 트럼프는 정치인으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트럼프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을 역임했고 다시 유력 대선후보가 된 데는 분명한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이룬 성과를 고려하지 않고 그를 극우 성향의 인기 영합 정치인으로만 매도하는 건 현실을 호도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경우 한·미 불협화음으로 번질 수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스 등에 따르면 트럼프의 일부 정책들은 효과가 있었다. 첫째가 그의 불법 이민 차단 정책이다. 트럼프는 대통령 시절 이민자들에게 망명 신청 기회를 주지 않고 신속하게 추방했다. 반면 바이든 정부의 관대한 이민 정책은 이민자들을 급격히 늘려 미국 유권자들의 반이민 정서를 확산시켰다. 블룸버그통신 등이 최근 7개 경합주 유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민 문제와 관련해 누구를 더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트럼프라고 답한 사람이 52%에 달해 바이든(30%)을 압도했다.   둘째가 미국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진단이다. 트럼프는 저임금 백인 노동자들이 워싱턴 엘리트층에 의해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됐다며 이들의 대변자를 자처했다. 진보에 편향된 미디어·학계는 트럼프의 진단을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이라며 무시했다.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경제 성장 부진과 노동시장 참여율 저조로 상당수 저임금 백인 노동자들이 암울한 미래로 인한 자살·마약중독 등 ‘절망의 죽음(death of despair)’으로 내몰리는 게 현실이다.   셋째가 경제 성적이다. 코로나19 기간을 제외하면 트럼프 임기 동안 미국 경제는 좋았다. 근로자 임금은 물가상승률을 웃돌았고, 실업률은 50년 내 최저 수준이었으며, 주식시장은 활황이었다. 블룸버그통신 여론조사에서 유권자의 36%는 투표할 때 경제 문제를 가장 고려한다고 했는데, 응답자의 51%가 ‘트럼프를 더 신뢰한다’고 말해 ‘바이든을 더 신뢰한다’(35%)를 앞질렀다.   넷째가 대외 정책이다. 트럼프 재직 시절 세계는 큰 분쟁을 겪지 않았다. 트럼프가 운이 좋았을 수도 있고 그의 예측하기 힘들고 위협적인 말들이 먹혔을 수도 있다. 반면 바이든 정부 들어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후티 반군의 홍해 항로 공격, 중국의 대만 침공 위협, 북한의 핵 공격 위협 등이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당선은 한국에 큰 도전이다. 트럼프가 북핵 위협을 억제할 한·미 동맹의 확장억지 전략을 얼마나 존중할지 의문이고, ‘미국 우선주의’에 따라 주한미군 감축, 한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을 요청할 가능성이 크다. 또 트럼프가 모든 수입품에 10% 관세 부과를 강행할 경우 무역 국가 한국은 작지 않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트럼프의 당선 확률이 높아지며 한국 정부는 트럼프 진영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 있다. 트럼프의 정책이 많은 미국인에게 먹혀드는 현실을 직시하고, 트럼프와 그 진영 인사들과 사전에 접촉해 한국에 우호적 시각을 가지도록 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4.02.07 00:31

  • [정재홍의 시선] 위기의 자유주의 세계 질서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지구촌에서 자유주의 세계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 권위주의 진영이 득세하고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움츠러드는 모양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있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대만 통일 의지를 밝히며 철권통치를 강화하고 있다. 오는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에서는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대결이 유력한 가운데 트럼프가 여론조사에서 앞서고 있다. 유럽에서는 극우 정당들이 반이민 정서를 이용해 세력을 불리고 있다.   러시아군은 지난달 29일 우크라이나 전역에 2022년 2월 전쟁 발발 이후 최대 규모의 공습을 벌였다. 푸틴은 “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며 공세를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푸틴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79.3%의 지지율을 기록해 오는 3월 대선에서 무난한 승리가 예상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미국 유권자들의 피로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친푸틴 성향의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푸틴에게는 유리한 환경이 마련된다. 미국·유럽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크게 감소한 상황에서 푸틴의 공세가 심해지며 러시아가 점령지를 인정받고 전쟁을 끝낼 가능성이 크다.   시진핑은 신년사에서 “조국 통일은 역사의 필연”이라며 대만과의 통일 의지를 분명히 했다. 오는 13일 치러지는 대만 총통 선거를 앞두고 대만 유권자에게 보낸 경고라고 파이낸셜타임스는 분석했다. 시진핑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대만을 통일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친미·독립 성향의 민진당 후보가 당선된다면 중국과 대만의 갈등은 더욱 고조될 전망이다. 그는 또 부패 척결과 군부 숙청 등을 통해 권력을 더욱 집중화하고 있다. 시진핑은 역사 유물주의에 따라 자본주의 미국에 대해 사회주의 중국이 최종 승리할 것이라 믿는다. 시진핑은 지난해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중 정상회담에서 “지구는 중국과 미국 두 나라가 살기에 충분히 넓다”고 말했다. 중국식 권위주의가 미국식 자유주의와 함께 지구촌을 양분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  「 권위주의 세력 지구촌에서 득세 한국은 자유주의 체제의 수혜자 미국 등 자유진영 연대 강화해야 」  유럽은 오는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정당이 세력을 확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은 내전에 시달리는 시리아·리비아 등에서 이민자가 대거 유입되며 반이민 정서가 팽배해지고 있다. 극우 정당들이 득세할 경우 우크라이나 지원 축소 등 국제 질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전망이다.   가장 큰 문제는 자유민주주의 보루로 여겨지던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로 기울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세계 질서를 유지·확산하는 역할을 해왔다.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은 세계 운송로를 안전하게 만들었고, 세계무역기구(WTO)로 대변되는 자유무역 질서는 전 세계 국가에 번영의 기회를 제공해왔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막대한 피해를 보며 미국 내에서 국제 문제에 나서기보다는 미국 이익을 돌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시리아 내전에 개입을 꺼리며 발생한 대규모 이민 사태는 반이민을 내세운 유럽 극우 정당이 약진하는 기폭제가 됐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가 재선한다면 세계는 더욱 권위주의 색채가 짙어질 것이다. 트럼프가 집권할 경우 주한미군 철수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탈퇴 등의 정책이 추진될 수 있고, 모든 수입품에 ‘10% 보편 관세’ 부과로 자유무역이 쇠퇴하고 보호무역이 활개 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일한 알리사 파라 그리핀 전 백악관 공보국장은 최근 ABC 방송에서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민주주의의 종말을 의미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로버트 케이건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밀림의 귀환(The Jungle Grows Back)』에서 2차 대전 이후 자유주의 세계 질서가 유지된 데는 미국의 힘이 뒷받침됐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미국의 상대적 힘이 쇠퇴하고, 미국 보수·진보 진영이 모두 국제 문제 개입을 꺼리며 이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 그는 자유주의 세계질서가 무너지면 국제사회에 약육강식의 정글이 펼쳐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은 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수혜자이다. 한국전쟁 이후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이 성공한 데는 미국이 보장하는 자유무역체제가 뒷받침됐다. 세계에서 권위주의가 힘을 얻으면 무역 국가 한국의 입지는 그만큼 줄어든다. 한국의 국력에 걸맞게 미국·일본·유럽 등과 연대해 자유주의 세계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 우리의 국익을 보장하는 길이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4.01.03 02:53

  • [정재홍의 시선] 호주의 당당한 대중 외교 배워야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 26일 부산에서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에서 “앞으로 (3국) 정상회의 개최가 머지않은 시점에 가시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공을 들였던 한·중·일 정상회의 연내 개최가 중국의 비협조로 사실상 무산됐다는 뜻이다.   이번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는 4년 전 회의와 비교해 대북 공조에서도 후퇴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박 장관과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무상은 모두 발언에서 북한 문제를 거론했지만,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겸 외교부장은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4년 전 회의 때는 3국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지만, 이번에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소통을 이어나가기로 했을 뿐이다. 중국 측은 당사국들이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일관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계열 글로벌타임스는 중국 전문가들을 인용해 한·미·일 협력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려면 한·일이 대만·동중국해·남중국해 등 중국의 핵심이익을 존중하고 더 많은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  「 한중일 정상회의 연내 개최 무산 중국, 한반도 비핵화에도 소극적 대중 관계는 의연하고 일관되게 」    중국은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도 한국을 외면하는 행보를 보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4시간 동안 회담하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반면, 윤석열 대통령과는 별도 회담 없이 3분 정도 만나는 데 그쳤다.   윤 정부 들어 한국은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는 등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8월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서는 한·미·일 공동성명 중에선 최초로 ‘중국’을 명시하면서 남중국해와 대만해협 등에서의 불법·강압적 활동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외교 전문가들은 중국이 미·일에 밀착하는 한국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길들이려 한다고 진단한다. 중국은 과거에도 한국 길들이기를 해왔다. 2016년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산 문화 콘텐트의 중국 수출을 차단하고, 중국 여행사들의 한국 단체여행 모집을 사실상 금지했다. 중국은 올해 초 ‘제로 코로나’ 정책 폐기에 따라 태국 등 60개국에 대한 자국민 단체여행을 허용하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지난 8월에야 풀었다.   한국 정부는 과거 중국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왔다. 전임 문재인 정부에서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공을 들이며 미·일과 멀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중국에 한국은 압박하면 물러나는 물렁한 나라라는 인식을 줬다.   이는 호주의 중국 대응과 대비된다. 호주가 2020년 4월 중국에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원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자, 중국은 호주산 육류·와인·석탄 등의 수입을 제한했다. 이로 인해 호주의 중국 수출 비중은 2020년 40.5%에서 2022년 29.5%로 떨어지는 등 타격을 입었다. 중국도 호주산 석탄 수입 금지로 2020년 겨울 심각한 전력난을 겪었다. 호주는 2021년 9월 미국·영국과 안보 삼각 동맹인 오커스(AUKUS)를 맺어 미국 주도의 중국 견제에 힘을 보탰다. 호주가 대중 외교에서 일관된 행보를 보이고 지난해 5월 친중 성향의 노동당이 집권하며 양국 관계는 정상화되고 있다. 시 주석은 지난 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앤서니 앨버리지 호주 총리와 7년 만의 정상회담을 갖고 “건전하고 안정적인 중국·호주 관계는 양국의 공동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중국은 한국에서 미국을 밀어내 한반도를 자국 영향권 아래 두려고 하고, 미국은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 등을 통해 대중국 견제에 한국을 더욱 끌어들이려 한다. 한국은 북한 위협 때문에 한·미 동맹이 필수이지만, 중국과의 경제 관계도 중요하다. 미·중 대결이 더욱 치열해지며 한국이 양국 사이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한국은 미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북한 위협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해방 이후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통해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뤘다. 미래에도 한국의 국익은 자유민주주의에 있다.   호주 사례에서 보듯 중국의 압박에는 국익에 기반해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중국이 언제까지나 한국을 무시할 수는 없다. 중국은 20% 이상의 청년 실업률과 불안정한 부동산 시장, 막대한 지방정부 부채 등으로 인해 경제 회복이 시급하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일관되게 내세우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의연하게 추진한다면 한·중 관계도 머지않아 정상화될 것이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3.11.29 01:01

  • [정재홍의 시선] 바이든과 시진핑, 가까워질 수 있나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미국 정부는 지난 17일 낮은 사양의 인공지능(AI) 반도체에 대해서도 중국 수출을 금지하기로 했다. 미국 상무부가 지난해 10월 첨단 AI 반도체 수출을 금지한 뒤 엔비디아가 속도를 낮춘 반도체를 개발해 중국에 수출하자 규제의 폭을 넓힌 것이다. 중국은 이에 맞서 지난 20일 배터리 핵심 소재인 흑연 수출을 오는 12월부터 통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는 전 세계 전기차와 배터리 업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중국산 흑연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한국의 관련 업계에 적지 않은 타격이 될 전망이다.   미·중의 수출 규제는 다음 달 11~1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나왔다. 이 회의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참석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할 가능성이 크다. 양국 관계가 개선되는 조짐을 보이는 국면에서도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중 대립은 거세지고 있다.     ■  「 미·중 패권 경쟁은 멈추지 않아 한·미·일 협력 체제를 기반으로 중국과의 경제 협력 넓혀가야 」    미국 주도로 글로벌 공급망 등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디리스킹(derisking·탈위험)은 중국과 밀접한 한국 경제에 큰 피해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18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디리스킹이 본격화하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4% 가까이 줄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일본·유럽연합(EU)의 1%대, 미국의 0%대 손실을 웃돈다.   미국은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중국 문제를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도 중국 견제에 나섰지만 범정부 차원의 정책이나 세계적 공조가 없어 한계가 컸다. 바이든 정권은 지난해 10월 발표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중국을 최대 지정학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중국에 맞서 경제·안보·정치 등 모든 요소를 통합한 종합 전략을 마련하며, 동맹·파트너 국가들과 연대할 것을 천명했다. 이 연장선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쿼드(QUAD, 미·일·인도·호주 협력체), 칩4(한·미·일·대만 반도체 동맹), 오커스(AUKUS, 미·영·호주 안보협력체),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등이 나왔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이 극심한 정쟁 속에서도 중국 견제에는 일치하고 있어 중국 견제 정책은 정권과 관계없이 지속할 전망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 공화당 내 극우파들이 자기 당 소속 하원의장을 해임한 사례에서 보듯 진영 갈등이 극심하다. 내년 11월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을 이긴다면 보호주의와 미국 우선주의가 드세질 수 있다.   중국은 시 주석을 중심으로 미국의 중국 견제에 맞서고 있다. 마오쩌둥 이래 중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쥔 시 주석은 자신의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에 따라 중국이 결국 미국을 물리치고 세계 최고의 국가로 부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 주석은 모든 중국인이 풍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 샤오캉(小康) 사회 실현과 중화민족 부흥이란 중국몽(中國夢)을 꿈꾼다.   문제는 마르크시즘을 앞세운 시진핑 사상이 현실과 동떨어질 때가 많다는 점이다. 시 주석은 공산당 일당 독재나 공동부유 정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인터넷 플랫폼이나 교육·문화오락·콘텐트 등에 철퇴를 가해 해당 산업이 고사 위기를 맞고 있다. 또 코로나 시기에 펼친 제로 코로나 정책은 개인보다 전체, 경제보다 정치, 합리보다 이념이 앞서며 불필요한 고통을 안겼다. 탕핑(躺平, 열심히 일하지 않고 평평하게 누워있기), 룬쉐(潤學, 이민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열풍은 공산당 억압에 맞서는 중국인의 소극적인 저항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대외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선 미·중이 협력하는 국제 체제가 최선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사라졌다. 미·중 전략경쟁이 기정사실이 된 만큼 이에 맞는 대응책을 찾아야 한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이를 억제하기 위한 한·미 동맹 강화는 불가피하다. 윤석열 정부가 전향적으로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며 한·미 동맹은 더욱 굳건해졌다. 강제 징용, 후쿠시마 오염수 등 현안을 관리하며 일본과의 관계를 다지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그렇다고 중국과의 관계를 방치할 수는 없다. 중국은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다. 한국 경제가 쇠퇴할 경우 한·미·일 협력 체제에서 한국은 주니어 파트너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미·중 경쟁 속에서 한국이 운신의 폭을 넓히려면 유럽연합(EU)·호주·인도·캐나다 등 비슷한 가치를 공유한 국가들과의 협력도 필수적이다. 정권에 따라 친미·친중 어느 한 편으로 쏠리는 걸 막으려면 대외 정책만큼은 진영이 아닌 국익에 기반한 국민 공감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3.10.25 00:31

  • [정재홍의 시선] 안보 근간 흔드는 초급 간부 처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국군의날을 맞아 경기도 연천군 육군 제25사단 병영식당에서 연 장병 간담회에서 “국군 통수권자로서 여러분들이 다른 것 신경 쓰지 않고 전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잘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말은 장병들에게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장병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으면서 물 샐 틈 없는 국방을 요구하는 건 지나치다. 첨단 국방 시대에도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건 사람이다. 우수한 병력이 높은 사기로 국방을 책임질 때 북한 위협을 억제하고 안보를 확보할 수 있다.     ■  「 초급 간부 지원율 역대 최저치 열악한 처우에 젊은 세대 외면 군 정예화 위해 처우 개선 시급 」    그런데 지금 군에서는 우려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군의 허리에 해당하는 초급 간부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 7월 기준 육군 학군장교(ROTC) 제도를 운영하는 전국 108개 대학 중 절반인 54곳이 후보생 정원에 미달했다. 초급 장교 모집난에 직면한 육군은 62년 만에 처음으로 ROTC 후보생 추가 모집에 나섰으나 100명 정도만 지원했다. 올해 전반기 ROTC 후보생 지원 경쟁률도 역대 최저인 1.6대 1에 그쳤다.   사관학교와 육군 3사관학교, 학사장교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2019년 각각 35대 1을 웃돌던 육사·공사의 남자 경쟁률은 2021년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육군 3사와 학사장교 경쟁률도 절반 안팎 하락했다. 부사관 후보생 경쟁률도 2018년 4.5대 1에서 지난해 3.2대 1까지 낮아졌다.   이는 병사 복무 기간이 단축되고 월급은 크게 오르는 데 반해 초급 간부 지원책은 소홀한 데 따른 것이다. 초저출산 인구 절벽 시대와 겹치면서 초급 간부 지원 기피는 더욱 심해질 수 있다.   현재 병사 복무 기간은 육군 기준 18개월이지만, ROTC는 군별로 24~36개월로 최대 2배까지 길다. 또 내년 병장 월급은 165만원(봉급 125만원+내일준비지원금 40만원)이고, 2025년에는 205만원(봉급 150만원+내일준비지원금 55만원)까지 인상된다. 반면 내년 소위 1호봉은 기본급 183만원에 공통수당 평균 101만원을 합쳐 284만원이고, 하사 1호봉은 기본급 182만원에 공통수당 평균 91만원을 합쳐 273만원 수준이다. MZ 세대 입장에서는 복무 기간이 길면서 일은 많고 봉급은 많지 않은 초급 간부보다는 병사 복무가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중위·소위, 중사·하사인 초급 간부는 병사들과 생활하며 부대 대소사를 챙기고, 유사시 병사들을 지휘해 적과 싸우는 군의 허리 역할을 한다. 이들의 사기는 병사들의 전투력으로 직결된다.   출산율 저하로 현역병 자원이 급감하는 상황에서 전투력 유지에 큰 몫을 담당하는 초급 간부 지원율이 하락하고, 중도에 군을 떠나는 상황은 심각하다. 초급 간부의 자존심과 사기를 살려주는 대책이 절실하다.   국방부는 내년 국방 예산안을 짜면서 초급 간부 처우 개선 명목으로 5620억원을 요청했으나 예산 당국은 1998억원만 반영했다. 고강도 건전 재정 기조의 내년 예산 편성 방침에 따라 국방부 요구안이 대폭 깎였다. 북핵 대응 3축 체계 등 전력 향상이 최우선으로 다뤄지다 보니 초급 간부 처우 개선은 후순위로 밀렸다. 이로 인해 초급 간부들의 휴일·야간 수당 신설 예산이 전액 반영되지 않았다. 1만원인 평일 당직 근무비를 3만원으로 인상하는 요구안도 거부됐다.   지난 5월 국회 앞에서는 “군 간부 당직비가 평일 기준 시급 714원에 불과하다”며 수당 체계를 현실화해야 한다는 1인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평일 기준 시급 714원은 최저임금 시급(올해 9620원)에 한참 못 미치고, 일반 공무원의 평일 당직비 3만원과도 큰 차이가 있다.   그동안 군은 초급 간부와 병사들을 소모품 취급하며 처우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왔다. 정치인들의 인식 개선과 표 계산 등으로 병사 처우는 크게 나아지고 있으나 초급 간부들은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해 사기가 떨어지면 국방력 강화는 사상누각이다.   초저출산으로 병력 자원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장기 복무 인원을 늘려 병력을 정예화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이를 위해서는 초급 간부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아 군이 젊은 세대에게 매력적인 직업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국방부가 초급 간부 처우 개선을 위해 요구한 예산 5620억원은 내년 국방 사업을 조정해 예산 당국과 협의하면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윤 대통령과 국방부, 군 당국은 장병들이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전투력 개선에 매진할 수 있도록 장병 처우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3.10.04 00:18

  • [정재홍의 시선] 현실화하는 중국 리스크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중국 경제가 위태롭다. 중국 최대 민영 자산관리 그룹 중즈계(中植系) 계열 국유기업 중룽(中融)신탁이 부동산 투자 실패로 3500억 위안(약 64조원)대의 지급 불능 상태에 빠졌다. 중국 5위 부동산업체 비구이위안(碧桂園·컨트리가든)도 상반기 순손실이 550억 위안(약 10조원)으로 예상되며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를 겪고 있다. 대형 부동산업체 헝다(恒大·에버그란데)와 완다(萬達)그룹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중국 경제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부동산시장 위축으로 중국 경제는 앞날이 불투명하다.     ■  「 부동산 등 중국 경제 위기 조짐 이념 앞세운 정책에 기업 외면 한국, 원칙 지키며 우호 중시를 」    외신들은 중국 경제에 ‘D(디플레이션)의 공포’가 현실화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지난달 중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0.3% 하락했다. 지난달 생산자물가지수(PPI)도 전년 동월 대비 마이너스 4.4%로 뒷걸음쳤다. 기업들이 신규 고용을 줄이며 지난 6월 중국의 청년 실업률은 21.3%로, 관련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높았다.   대외 환경도 녹녹하지 않다. 미국은 과거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 권위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하고 ‘건설적 관여’에 나섰다. 그 기대가 어긋나며 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이후 ‘맞춤형 봉쇄’로 전환했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은 사사건건 대립하며 진영 대결을 벌이지만 중국이 비자유주의에 기초한 공세적 외교안보 전략을 펼친다는 인식에는 초당적으로 합의하고 있다. 2021년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며 칩4(한·미·일·대만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 쿼드(미·일·호주·인도 안보협의체), 오커스(AUKUS, 미·영·호주 외교안보협의체) 등 동맹국과 우방을 동원한 대중국 포위망은 굳건해지고 있다.   중국은 미국 등 서방의 공세에 공산주의 이념 강화로 맞서고 있다. 2022년 10월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을 버리고 공산주의 이념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는 실용보다 사상을 중시하는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을 통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꿈꾼다.   그러나 공산당 일당독재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해 정책을 펼치기 힘들다. 시 주석은 공산당 일당독재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알리바바 등 빅테크(거대 정보기술기업)를 탄압했고, 사교육·게임산업 등을 단속하고 있다. 최근 경제가 부진하자 중국 정부는 빅테크 규제를 풀고 플랫폼 산업 지원 의사를 밝혔으나 기업들은 몸을 사리고 있다. 옛 소련과 동유럽 몰락에서 보듯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실패했다. 시 주석의 이념 공세도 결국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마이클 베클리 터프츠대 교수와 할 브랜즈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공저한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원제 Danger Zone)는 중국이 이미 정점을 지나 하락기에 접어들었고, 더 쇠퇴하기 전에 패권을 차지하려고 미국과 무력 충돌을 불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성공 요인이었던 지정학, 개혁개방 정책, 인구 배당 효과, 풍부한 자원이 미국의 견제 등으로 적대적으로 바뀌면서 성장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한때 강력하게 상승했던 후발 패권국이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다른 방법으로는 경쟁국을 따라잡지 못할 때 전쟁을 일으킨다는 게 저자들의 인식이다. 1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이나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그런 사례라고 설명한다. 시 주석이 무력을 동원해 대만을 통일하려 한다면 미국도 이를 방관할 수 없어 세계적 파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중국 리스크는 한국에 엄청난 도전이다. 세계 1위 상품 소비국인 중국의 위기는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코로나 봉쇄 해제 이후 중국 경제 활동 재개의 효과가 기대에 못 미치고, 중국 부동산 위기에 따른 디플레이션 공포로 한국 수출에 적신호가 켜졌다. 중국 경제 부진을 직시하고 이를 대체할 수출시장과 품목을 다변화하고 반도체 등의 기술 경쟁력을 더욱 높이는 조치가 필요하다.   패권 도전과 관련해서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단결해 중국의 대만 침공이 중국의 이익이 아니며 침공을 감행할 경우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는다는 점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한다. 한국은 중국과의 우호·선린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원칙은 일관되게 지키는 게 최선이다.   오는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리는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중국에 맞서 3국 합동군사훈련 정례화와 3국 정상회의 연례화 방안 등이 논의될 전망이다. 한국은 미·일과의 연대 강화와 함께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유럽연합(EU)·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인도·호주 등과의 협력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3.08.16 00:50

  • [정재홍의 시선]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잡는 대입 개혁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한국과 미국에서 대입 제도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사교육 주범으로 수능 킬러 문항을 언급하며 입시 제도의 공정성 논란에 불을 붙였다. 미국에선 연방대법원이 소수 인종 우대 대학 입학 혜택인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을 위헌으로 결정해 찬반 논란이 뜨겁다. 한·미의 대입 제도 논란이 국가적 논란으로 번진 까닭은 대학이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교육의 공정성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  「 소득격차가 교육격차로 직결 부유층 자녀가 명문대 휩쓸어 저소득층 선발 비중 늘려가야 」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18~24세 미국인 3100만 명 중 0.2%인 6만8000명만이 아이비리그(하버드·예일·프린스턴 등 미국 북동부 8개 명문 사립대)에서 공부한다. 기부금 규모가 각각 530억 달러(약 69조원), 360억 달러(약 47조원)에 달하는 하버드대·프린스턴대 등이 학생 수를 늘린다면 대학 문턱이 다소 넓어질 텐데 이들 대학은 학교 위상을 흔들 수 있는 정원 늘리기에 별 관심이 없다.   미국 교육 전문가들은 아이비리그 대학이 체육 특기자, 동문 자녀 우대, 기부금 입학제, 교수·교직원 자녀 우대라는 잘못된 관행만 청산해도 입시 공정성이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버드대의 경우 이런 관행으로 입학한 학생이 전체의 43%에 달한다.   미국 명문대에서 체육 특기자라고 하면 농구를 잘하는 흑인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상은 부유층 백인들이 많다. 체육 특기자의 65%가 백인이다. 이들은 라크로스·보트·조정 등 부자들이 하는 운동을 한다. 엘리트층의 학력 대물림 수단이 된 동문 자녀 우대 입학의 수혜자도 주로 돈 많은 백인이다. 기부금 입학제의 경우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가 하버드대 졸업생인 아버지의 250만 달러 기부 덕에 하버드대에 입학한 사례에서 보듯 부유층 자녀들이 혜택을 독점한다.   소수 인종 우대 입학 제도로 흑인이나 히스패닉이 겉으로는 혜택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가장 큰 혜택은 돈 많은 백인에게 돌아간다. 이들은 양육과 초중고 교육에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데서 나아가 대입에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좋은 대학에 간다.   한국은 동문 자녀 우대, 기부금 입학제, 교수·교직원 자녀 우대 등이 없다는 점에선 미국에 비해 대입 제도가 공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대입도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지 오래다. 부유층과 저소득층의 자녀 사교육비는 크게 차이 난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월 소득 800만원 이상 가구의 학생 1인당 사교육비는 월 64만8000원인데 반해, 월 소득 200만원 미만 가구는 12만4000원에 그쳐 격차가 5배 넘게 벌어졌다.   부유층의 사교육 투자는 명문대 진학으로 이어지고, 이 추세는 심해지고 있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장학재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서울대·고려대·연세대(SKY) 신입생 장학금 신청자의 50%가 고소득층인 소득분위 9~10구간 학생으로 집계됐다. 5년 전보다 13%포인트 늘어났다. 반면 기초생활수급·차상위·소득분위 1~2구간의 저소득층 학생 비중은 2021년 11.6%로 5년 전보다 10%포인트 하락했다. 명문대 진학이 계층 이동의 주요 사다리인 상황에서 계층 이동성이 둔화하고 있다는 경고 신호다.   부유층이 자녀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까닭은 좋은 대학 진학이 자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명문대를 졸업하면 좋은 직장을 얻어 인생에 성공할 확률이 높은 한국 사회에서 사교육 수요는 클 수밖에 없다. 수능 킬러 문항이 사교육을 조장한 측면이 있지만 킬러 문항이 사라졌다고 사교육이 크게 줄지는 않을 것이다. 사교육은 학생 잠재력을 키우지 못한 채 교육 불평등을 심화하고 세계 최저 출산의 원인이 되고 있다.   교육이 공정한 사회에 이바지하고 계층 이동의 수단이 되려면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할 필요가 있다. 가난하지만 공부 잘하는 학생이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이 넓어져야 한다. 이스라엘은 소득 기반의 적극적 옹호 정책(Class-based Affirmative Action)으로 사회경제적 취약 계층 학생들에게 대학 입학의 문을 넓히고 있다.   한국 사회가 활력이 넘치고 지속해서 발전하려면 출신 집안과 관계없이 유능한 학생이 대학에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대입에서 저소득층 학생의 선발 비중을 높이는 건 대학의 다양성과 사회의 역동성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3.07.12 00:52

  • [정재홍의 시선] 위기의 한국 경제, 살 길은 과학기술력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한국 경제가 위태롭다. 올해 1분기 한국 경제는 전 분기보다 0.3% 성장하는 데 그쳤다. 지난해 4분기 -0.3%로 역성장한 데 이은 저성장이다. 반도체 등의 수출이 맥을 못 추기 때문이다. 지난달 수출은 522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2% 줄며 8개월 연속 감소했다. 문제는 수출 주력 상품의 경쟁력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경련 조사 결과 수출 상위 10대 품목 중 반도체 등 전자기기, 기계, 자동차, 선박 등 7개 품목의 수출 경쟁력이 지난 10년간 낮아졌다.   한국 경제를 뒷받침하던 중국 특수도 사라졌다. 한국은 그동안 중국에 중간재와 부품을 공급하며 중국 성장의 혜택을 누려왔다. 그런데 이제 중국 기술력이 높아져 가격 경쟁력이 있는 자국 제품을 사용하며 한국산 중간재·부품을 사지 않아도 되게 됐다. 그 결과 한국 수출의 30%를 차지하던 대중 수출이 12개월 연속 줄었다.     ■  「 수출 품목 경쟁력 갈수록 낮아져 의대 쏠림에 미래먹거리도 타격 의대 정원 늘리고 이공계 우대를 」    성장 기반도 약화되고 있다. 올해 1분기 합계출생율은 0.78로 역대 최저 수준인 반면, 생산가능인구(15~64세) 100명에 대한 고령(65세 이상) 인구 비중을 뜻하는 노년부양비는 26.1명으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일할 사람은 줄어드는데 이들이 먹여 살려야 하는 노년층은 급속히 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한국 경제 성장의 장기적인 리스크는 인구 통계학적 압력이 심화하는 것”이라며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2025년 이후 약 2.0% 수준으로 둔화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해 하반기 경제전망에서 “2020년대 이후 인구 감소와 급속한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로 성장세는 점차 둔화되고 2050년에는 경제성장률이 0.5% 수준으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저출산·고령화는 한국의 미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이영욱 KDI 연구위원에 따르면 ‘자녀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2011년 41.7%에서 2021년 30.3%로 10%포인트 이상 줄었다.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소득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달 25일 발표한 2023년 1분기 가계동향에 따르면 소득 상위 20%인 5분위 가구의 실질소득은 1년 전보다 1.2% 증가한 반면, 소득 하위 20%인 1분위 가구의 실질소득은 1.5% 감소했다.   한국이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성장 기반을 늘리는 게 급선무다. 먼저 저출생·고령화 완화 정책이 필요하다. 보육·교육정책을 개혁해 자녀를 낳아 키우기 편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자녀를 낳아 키우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육아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또 사교육에 기대지 않고도 자녀 교육에 큰 문제가 없도록 공교육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부모들이 노후 대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자녀 사교육에 투자해야 하는 나라는 비정상이다. 지속가능한 고령화 사회를 위한 연금 개혁과 정년 연장, 이민 확대가 필요하다. 모두 저항이 만만치 않은 사안이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려면 필요한 개혁이다.   특히 성장 잠재력을 높이려면 과학기술 인재 양성이 절실하다. 반도체·배터리·인공지능 등 미래먹거리 산업 경쟁력은 인재 양성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의대에 가려고 이공계를 기피하는 현상이 심각하다. 한국의 미래산업 생태계에 치명적이다. 이공계 우대 정책과 함께 의대 정원을 늘려 의사 부족을 해소하고 의사의 희소성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중산층은 국가를 지탱하는 보루다. 중산층이 무너지면 사회는 양극화돼 극심한 갈등으로 치달을 수 있다. 빈부 격차가 심한 중남미에서 표심을 노린 포퓰리즘 정책으로 국가가 엉망이 되는 사례들이 적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3일 국무회의에서 “두터운 중산층은 국가의 안전판”이라며 “정부는 활기찬 시장 정책으로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냄으로써 취약층이 중산층에 두텁게 편입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힌 건 바람직한 방향이다.   취약층이 중산층으로 활발히 이동하려면 정치적·경제적 포용성이 커져야 한다. 정치적 포용성과 경제적 포용성은 서로 되먹임한다. 한국은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 쟁취를 통해 정치적·경제적 포용성을 확대한 대표적 국가다. 선거에서 양대 정당이 과대 대표되고 군소 정당은 과소 대표되지 않도록 선거제도 개편을 통해 정치적 포용성을 확대하고, 지나치게 벌어진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남여 임금 격차를 줄여 경제적 포용성을 확대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3.06.07 00:54

  • [정재홍의 시선] 달려가는 미국, 움츠러든 일본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미국의 놀랄만한 경제 성적의 교훈’이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광범위한 경제 통계를 기반으로 작성한 이 기사는 지난 30년간 미국 경제가 두드러진 성과를 거뒀다고 전했다.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 경제가 쇠퇴하고 있다는 기존 인식과 상반되는 보도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미국은 정치 양극화와 빈부 격차가 극심하고, 의료보험 부실로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사람이 많아 선진국 중 수명이 가장 짧은 나라라는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미국 경제는 지난 30년간 엄청난 역동성으로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할 성취를 이루었다.     ■  「 ‘혁신에 혁신’ 미국, 괄목 성장 변화 뒤진 일본, 30여년 부진 한국은 창의·역동성 되살려야 」    경제 바로미터인 국내총생산(GDP)의 경우 미국이 지난해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 수준으로, 30년 전과 비슷하다. 이 기간 중 중국 경제가 엄청나게 도약하고, 인도·브라질 등도 크게 성장한 걸 고려하면 미국 경제가 선방했다. 이를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미국의 성취가 뚜렷해진다. 주요 7개국(G7)에서 미국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40%에서 지난해 58%로 뛰었다. 미국의 1인당 GDP는 30년 전 서유럽 국가들보다 24%, 일본보다 17% 많았으나 지난해에는 각각 30%, 54% 많았다. 일례로 미국 오클라호마 트럭 운전사가 포르투갈 의사보다 더 많이 번다.   미국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앞장섰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미국 GDP에서 사회복지 지출 비중은 90년 14%에서 2019년 18%로 올랐다. 또 2021년 미국의 빈곤율은 7.8%로, 미 인구조사국이 빈곤율 조사를 시작한 2009년 이후 가장 낮았다.   미국이 뛰어난 경제 실적을 거둔 이유로 방대한 시장과 함께 풍부한 인적 자원,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이 꼽힌다. 미국 노동생산성은 지난 30년간 67% 증가해 유럽(55%)·일본(51%)을 앞섰다.   미국 대학은 세계적 경쟁력을 가졌다. 영국 신문 타임스의 대학 평가에 따르면 세계 상위 15개 대학 중 11개가 미국 대학이었다. 미국 정부와 민간의 연구개발(R&D) 지출은 미국 GDP의 3.5%로, 대부분의 선진국을 앞섰다. 창업 열기도 뜨겁다. 미국에서는 2021년 540만개의 기업이 창업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창업에 실패했을 때 개인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국가 중 가장 낮다.   이에 반해 일본 경제는 쪼그라들고 있다. 일본 경제는 한때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였으나 중국에 이어 올해 독일에도 역전당해 4위로 밀려날 처지다. 장기화한 디플레(물가 하락)와 급격한 엔저가 맞물린 결과다. ‘버블 경제’ 절정기인 1980년대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미국을 앞질렀고, 세계 시가총액 상위 10대 기업 중 8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일본의 장기 경제 부진 때문이다. 환율·물가를 고려한 구매력평가 기준으로 일본의 1인당 GDP는 2018년 한국에 추월당했고, 수년 내 명목 달러 기준으로도 뒤처질 전망이다.   일본 경제가 주저앉은 이유로 80년대 중반 달러화 대비 엔화 가치를 높인 플라자합의와 일본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킨 미·일 반도체협정이 거론된다. 이는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다. 일본은 80년대까지 이어진 메인 프레임 시대에는 반도체 강국이었으나 PC·인터넷·스마트폰 등 세계적 디지털 추세에 뒤처지며 국가 경쟁력이 추락했다. 시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30년 전 세계 최대 반도체 국가였던 일본은 메모리 분야에서 키옥시아 한 곳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주요 기업들은 3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화가 없다. 일본은 과거에 안주하며 혁신을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왔다.   한국은 일본보다 빠르게 변화에 적응해왔다.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차 등이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선 데는 시대 흐름에 맞춰 혁신해 왔기 때문이다. 반면 최근 한국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다. 지난달 무역수지는 14개월 연속 적자이고, 수출은 7개월 연속 마이너스다. 최대 수출품인 반도체 부진으로 전체 수출이 직격탄을 맞았다. 저출산·고령화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가운데 반도체를 대체할만한 미래 먹거리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경제 역동성을 되살려야 한다. 조지프 슘페터가 역설한 ‘창조적 파괴’,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강조한 ‘애니멀 스피릿’이 살아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도전보다 안정을 우선하는 사회는 역동성이 없다. 정부와 민간이 기업 하기 좋고, 실패가 용인되는 환경을 조성한다면 교육 수준이 높고 도전 정신이 있는 한국인의 역동성은 금세 꽃 피울 수 있다. 한국이 미국의 길을 가느냐, 일본의 길을 가느냐는 사회 역동성에 달렸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3.05.03 00:52

  • [정재홍의 시선] 국가 근본 흔드는 ‘이공계 엑소더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최근 한 모임에서 중학생 남자아이를 미국에 홀로 유학 보낸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한 해 6000만원이 넘는 아들 유학비를 대느라 힘겨워하면서도 아들이 미국 학교에 잘 적응한다며 다행스러워했다. 또 아들이 미국에서 대학까지 나와 그곳에서 취업해 살기를 바랐다. 그러자 초등학생 아들을 둔 다른 아버지가 “내 아들도 미국에서 취업했으면 좋겠다. 10여년 뒤 아들이 취업할 때에는 한국에 좋은 일자리가 없을 것”이라며 “한국엔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이들이 한국의 미래를 비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의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8로 세계에서 가장 낮았다. 결혼과 자녀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갈수록 낮아지며 출산율 감소 추세는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반면 급속한 고령화로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지난해 17.5%에서 2050년 세계 최고 수준인 39.4%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현재 세계 10위권인 한국 경제는 2050년 15위권 밖으로 밀려나고, 2060년 이후에는 주요 국가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설 전망이다.     ■  「 저출산·고령화에 미래 불투명 최상위 인재들은 의대에 몰려   산업 이끌 이공계 파격 지원을 」    저출산·고령화는 국민연금 재정도 급속히 고갈시킬 것이다. 국민연금 재정추계전문위원회는 현행 제도를 유지할 경우 2041년에 기금이 적자로 전환되고, 2055년에는 바닥날 것으로 예측했다. 많은 청년이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도 나중에 연금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가능한 한 빨리 합리적인 수준으로 인상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연금개혁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3대 개혁의 하나로 내걸었지만 행정부가 아닌 국회에서 주도하게 한 데다 국회마저 사실상 손을 놓으며 연금개혁이 언제 이뤄질지 오리무중이다.   미래가 불투명하니 의대 등 안정적 일자리를 원하는 수요는 치솟고 있다. 고급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는 카이스트 등 4대 과학기술원에서 최근 5년간 1000명이 넘는 학생이 중도 이탈했다. 올해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자연계열에 합격했으나 등록을 포기한 학생은 737명이다. 이중 상당수는 의대에 진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가 야심 차게 지원책을 마련한 반도체학과에서도 등록 포기자가 많았다. 의대 정시전형 합격자 중 재수생을 포함한 N수생 비율은 8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공계 엑소더스’와 ‘의대 블랙홀’이다.   최상위 인재의 의대 쏠림은 국가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의대생들은 졸업하면 대개 일반의로 환자를 돌본다. 환자를 돌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최상위 인재들을 독식할 만큼은 아니다. 의사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바이오 등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에서 일하지 않는다.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을 유지하고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려면 이공계 인재를 많이 배출해야 한다.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미래 먹거리 산업은 얼마나 많은 이공계 인재들을 길러내느냐에 달렸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기아차·LG에너지솔루션 등이 미래에도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는 기업이 되려면 세계적 수준의 이공계 인재들이 수혈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전폭적인 이공계 지원과 함께 국민 의식 전환이 있어야 한다. 정부는 최우수 인재들이 의대가 아닌 이공계에 지원하도록 과학기술 인재 육성을 위한 예산 확대와 기술개발 관련 세제 혜택, 이공계 진로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 등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초·중등 때부터 이과 수업 비중을 50% 이상(현재는 30%) 늘려야 한다. 대통령이 과학기술자를 요직에 임명하는 등 이공계 우대 정책을 지속해서 펼칠 필요가 있다.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은 회고록 『작은 꿈을 위한 방은 없다』에서 이스라엘의 성공 비결로 “거침없이 상상하라. 내일의 지식을 선점하라. 첨단기술 강국 이미지를 구축하라”고 말했다. 불모의 사막을 옥토로 바꾸고 기업가정신을 장려해 세계적 창업국가로 거듭난 이스라엘의 성공은 한국의 성장 신화와 다르지 않다.   한국은 6·25 잿더미에서 1인당 소득 3만3000달러의 선진국으로 거듭났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파동, 97~98년 외환위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재도약했다. 저출산·고령화와 미·중 전략경쟁, 불투명한 미래 먹거리는 한국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이를 타개하려면 세계적 수준의 이공계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국가 역량을 모아야 한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2023.03.29 00:53